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이소 구니아키 (문단 편집) === 조선 총독 고이소 === [[조선 총독]]이 되자 [[미나미 지로|전임자]]의 조선 [[민족말살정책]]을 그대로 전수받아 [[창씨개명]]과 한글 사용 및 한국사 교육을 전면 금지시켰으며 이를 통해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서 한글학자들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탄압은 탄압대로 하면서 한편으로 이중적인 정책을 하여 조선인들에게 [[트롤링]]을 벌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고대사에 빠져 있었던 총독 중 한 명이었는데, 나름대로 연구한 고대사 지식을 바탕으로 단군=스사노오 설을 주장한 것이 바로 고이소였고, 이거 때문에 경성제대에서는 총독이 미쳤다고 발칵 뒤집혔다. 어떻게든 조선이 내지의 일부라는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겠답시고 '''"사실 나도 조선인 혈통이다"''', '''"일본 관서지방은 거의 다 조선인 후손임을 확신한다"''' 따위의 [[아무말 대잔치]]를 서슴없이 벌이기도 했다. [[식민사관]] 역시 고이소 총독 시절에 상당히 수정되어 '늘 중국에 굽신거리며 사대나 하던 조선' 이라는 기존의 비하적 사관을 '''지나인들의 침략에 맞서 유연한 외교로 일본인의 순수성을 사수한 조선'''으로 포장하기도 하며 조선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동시에 내선일체를 정당화 하려는 아스트랄한 발언들을 반복하였다. 내외지행정일원화 조치를 통해 조선을 [[일본 제국|일본]]과 동등한 법역으로 취급하려고 했으며 내선평등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장기적으론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완전히 동화를 시키고 단기적으론 조선인들을 일본의 전쟁으로 대대적으로 동원하려는 술책이었다. 전임자가 제창했던 지원병 제도에 '''학도특별지원병 제도'''를 더해 [[조선]] 청년들을 적극적으로 전쟁에 동원하고자 했다. 근로정신대와 강제징용, 나아가 일본군 위안부 역시 이의 악행 중 일부로 거론된다. 후에 [[신민당(1967년)|신민당]] 총재가 되는 [[이철승]][* [[10월 유신]] 이후 친여당 성향("[[사쿠라(정치)|사쿠라]]")으로 욕을 먹긴 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엔 열혈 학생이었다.]이 학병거부운동을 벌이자 면담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어르고 달래보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말돌리기나 하는 고이소에게 이철승은 제대로 된 대답을 받지 못했다며 일침을 가하고 돌아갔다. 대담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학생들: 일본은 대동아 성전(聖戰)이라고 하고,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모두 독립을 인정하면서, 왜 2,000만 명의 조선(朝鮮)만 독립시키지 않습니까? 나라의 독립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개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을 걸고 학병거부운동을 전개하겠습니다! >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과 일본은 동조동근(同祖同根)이다. 그러기에 조선과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가 되어야 해, 제군의 말에 일리는 있어. 그러기 때문에 내가 부른 게 아닌가. 조선인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게 바로 내 직책이야. (이철승 등을 보며) 어느 학교 누구인가? > 이철승: [[보성전문]] 이철승(李哲承)입니다. > 고이소 구니아키: 음...[[김성수(1891)|김성수]](金性洙)[* 훗날 [[고려대학교]]의 설립자 겸 초대 이사장이자 [[대한민국 부통령]]이 되는 그 인촌 김성수 맞다. 충숙공 [[이용익]]이 세운 보전을 인수하여 교장을 지냈었으며 [[동아일보]]의 창립자였다.] 선생은 물샐 틈 없는 인물이지... > 학생들: 그러면 이번의 전문학교 정비에 보성전문도 폐쇄되는 겁니까? (고이소가 제대로 된 답변을 해 주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자) 못 알아 듣겠습니다. 우린 이제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천황의 신민으로서 전쟁터에 나가서 죽을 수 있는 신성한 권리를 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하며 징병제의 대가로 참정권을 받아야 한다는 조선인 엘리트들의 요구에 대해서 일본 정계는 언어도단이라는 것이 이때까지만 해도 지배적인 반응이었다. 사실 조선인을 일본군에 받아들이는 것도 일본군 입장에선 상당히 양보한 것이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던 육군에선 이러다간 일본인은 다 죽고 출산율 높은 조선인만 남게 생겼으니 조선인도 '''같이 죽어야''' 균형이 맞는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아서 조선인 징병 반대론자였던 도조가 42년부터 태도를 바꾸어 조선인 징병을 마지못해 밀어붙이는 판국이었고 엘리트적인 해군은 이 와중에도 조선인이나 대만인은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히로히토도 조선인 징병제 안건이 상주되자 "그럼 조선인들이 참정권도 달라는거 아니냐?"라고 물었을 정도로 조선인들에게 의무를 부여하면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는 일본 정계의 합의된 우려였다. 하지만 1943년 카이로 선언으로 연합군이 조선의 독립을 약속하고 사이판 함락으로 도조 내각도 나가리되면서 [[조병옥]] 등 [[조선인]] 엘리트들이 조선인 총리대신이 나올 거란 보장이 없으면 재미 없다는 돌직구를 [[조선총독부]] 관리들 앞에서 날려버리고 공출로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그야말로 조선도 못 건질 판이 되자 어떻게든 조선을 일본 제국 통치 하에 묶어두기 위해 망하기 직전에 참정권을 던져주고 조선인 [[귀족원(일본)|귀족원]] 의원들을 칙임하게 되지만 몇 달 못가 조선이 해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